닥터 노먼 베쑨

전남의대 정신과 / 전남대학교병원 소아청소년 정신건강클리닉
최 영


인간의 도덕발달에 대한 연구 과정에서 자주 인용되는 사례(Lawrence Kohlberg의 도덕발달 이론)가 있다.

    Heinz의 아내는 암에 걸려 죽음이 임박했다. 아내를 구하는 유일한 약은 동네 약제사가 발명한 라디움이라는 약이다. 하지만, 값이 비싸고 원가의 10배를 받고 있다. 절반 밖에 돈을 구하지 못한 Heinz는 약을 싸게 팔거나 외상으로 달라고 부탁했으나 약제사는 거절했다. Heinz는 절망한 나머지 아내를 구하기 위해 밤중에 약국 문을 부수고 들어가 약을 훔쳤다.

Heinz가 훔친 행동은 처벌의 대상이기 때문에 나쁘다고 볼 것인가? 아내를 구하기 위해 훔쳤으므로 정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죄는 지었지만 동기가 순수하므로 용납해주어야 하는가? 어떤 이유에서건 법은 존중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죄 값을 치루고 감옥에 가야할 것인가? 어쨌든 사회질서가 이루어지도록 법에 복종해야 할 것을 Heinz에게 강요해야 하는가? 법보다 우선하는 개인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것인가? Heinz가 그렇게 할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기는 하나 법의 입장에서 보면 그에게 잘못이 있다고 판단할 것인가? 더 이상 그를 옳다거나 그르다고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며 판단을 유보할 것인가? Heinz가 아내를 위해 도둑질할 법적인 권리는 없지만 상위의 도덕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볼 것인가?

그도 저도 아니면... 10배나 이윤을 붙인 약제사에게 죄를 물을 것인가? 또 아니면 정당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제도를 제공하지 못한 국가나 사회 제도에 원죄라는 돌을 던질 것인가?

이 글을 쓰는 오늘 현재 의약분업 시행과 관련된 치열한 고뇌가 진행 중이다. 적어도 의사들은 그렇다. 정당한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6월 20일부터 개인의원은 폐업을, 종합병원의 전공의들은 파업을 시작하고, 그리고 의과대학의 교수들은 사직서를 제출할 것으로 보인다.

이 결정들에게도 우리는 앞의 사례에서 Heinz의 행동에 적용했던 법적 도덕적 잣대를 대 볼 수 있다.

고통받는 환자를 팽개친 행동에 죄를 물을 것인가? 제 밥그릇을 챙기기 위한 집단 이기주의로 매도할 것인가? 10년, 20년 뒤 예상되는 한국 의료의 붕괴를 막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판단을 유보할 것인가? 법적으로 죄는 분명하지만 상위의 도덕적 권리를 인정해 줄 것인가?

지난 밤 모처럼 내게 찾아온 불면의 늦은 시각, 낡은 책 한 권을 10년 만에 다시 꺼내 들었다. 90년대 들어 의사나 의학도라면 한번 정도는 읽어보았을 닥터 노먼 베쑨 (Dr.Norman Bethune)이었다.

캐나다의 흉부외과 의사로서 스페인과 중국의 전쟁에 참가하였던 사람의 일대기를 소설화한 것이다. 그는 세균이든 사회체제든 인간의 건강과 생명을 좀먹는 것이라면 그 대상을 가리지 않고 온몸으로 맞섰던 진정한 큰 의사로 의학도들에게는 각인되어 있다. 일반인들이야 슈바이쳐를 대표적인 서양의학의 의사상으로 기억하겠지만, 슈바이쳐는 소위 구미 열강의 제국주의의 선봉에 서서 아프리카를 침공하는 선전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비판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의 영문판의 원 제목은 "The Scalpel, the Sword"인데.... Scalpel은 외과용 메스라는 뜻이고, Sword은 싸울 때 사용하는 칼이라는 뜻이다. 멋지게 번역한 것이 "생명의 칼, 정의의 칼"이다.

똑 같은 칼인데 쓰는 용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한 사람을 위해 사용하는 칼이냐, 여러 사람을 위해 사용하는 칼이냐..는 뜻도 함축된 매우 잘 붙여진 제목이라는 감탄을 10년전에 한 적이 있다.

이제 얼마 뒤 나는 Scalpel을 들 것인가? Sword를 들 것인가?

책 속의 한 귀절이 머리 속을 맴돈다.

"나는 부상병들을 동정하지 않는다. 나 역시 부상병이 될테니까....." (www.DrChoi.pe.kr)

- 2000.6.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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