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시대의 소아청소년 정신건강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학교실 / 전남대학교병원 정신과 소아청소년 정신건강클리닉
최 영


아이들의 고민은 하늘의 별과 같이 많다. 그리고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꿈은 없다. 아이들은 꿈 대신 절망의 씨앗을 가슴에 품고 산다. 그 씨앗은 때때로 치명적인 독이 서린 싹을 틔우기도 한다. 네 명의 여중생이 몸뚱이를 깨뜨려 그것을 내보여 주기 전, 그들이 얼마나 위태한 상태인지 살피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한겨레 21. 1998년 4월 9일자 기사 중에서)

# 우리는 요즈음 어떻게 살고 있나

IMF라는 단어의 홍수에 우리 사회가 휩싸여 있다. 지겹다는 소리도 들린다. 신문지상의 대기업 부도는 자주 접하는 소식이므로 더이상 관심거리가 되지 못하기 쉽다. 일반인들도 TV 뉴스를 통해 BIS, 모라토리움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배우게 되고 신용평가기관이 무엇이라는 둥, 상식이 풍부해지고 국제화와 세계화를 뒤늦게 실감할 기회가 주어지기는 했다. 신문의 일면에 오늘의 환율이 자리를 잡게 되어 그 날의 하루 기분을 좌우하기도 한다.

"IMF시대의 우리의 자세"가 공개 강의나 사내 교육의 단골 제목으로 등장했다. 몇 월 대란설 등의 단어가 우리 모두를 위축시키고 불안에 떨게 한다. 원화의 평가절하로 갑자기 우리 모두는 절반 정도 가난해졌다. 고 금리로 인해 가난한 자는 더욱더 가난하게 된다. 장롱 속에 달러를 많이 가지고 있거나, 가치가 떨어졌다고 하지만 현찰(원화)이 주머니 가득 있는 사람들은 더욱 살맛이 난다.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더 부유해지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 대부분은 더욱 박탈감을 느낀다. 빈약해진 주머니가 더 가볍게 느껴지고 왠지 위축이 된다. 실직자에 대한 대책이 발표되고, 과거의 실정에 대한 검찰수사가 이루어진다는 둥 언론의 여러 보도는 위안을 주기보다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 마치 IMF라는 폭풍 속에 홀로 떠 있는, 언제 가라앉을지 모르는, 그래서 타이타닉호와 같은 운명이 될 수도 있는 배에 타고 있는 승객의 마음이 곧 우리 모두의 마음이라고 비유하면 지나칠까

# 요즈음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살펴보자.

IMF가 몰고 온 것으로 대표적인 것은 가난이다. 다니던 회사의 부도나 도산, 누군가 멋있게 이름 붙인 명예퇴직, 정리해고, 장사가 안되어서 생기는 가계 수입의 감소. 이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가난해졌다. 이 경제적 어려움이 왜 오게 되었나, 누구 때문인가가 이해가 안되어서 생기는 무력감과, 분노, 상실감, 박탈감. 앞으로 어떻게 될지가 불투명해서 생기는 미래에 대한 불안. 그리고 잠 못 이루는 밤. 이 시대의 어른들 마음 상태가 심상치 않다.

이런 어른들 밑의 우리 아이들도 덩달아 마음이 심상치 않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실직 상태에서 술 먹고 난장판을 피우는 아버지, 너희들만 없었으면 내가 이렇게 살지 않는다고 푸념하는 어머니 밑에서 우리 아이들은 눈치가 늘고 괜히 위축된다. 내가 뭘 잘못해서 우리 부모가 저런 것은 아닐까?

가정 불안의 최대 원인은 가장의 실업이다. 실업으로 인한 가정불화와 이혼이 증가했다. 가난은 폭력을 부른다. 부부 싸움이 늘고, 툭하면 자녀가 구타당하기도 한다. 부모의 실직 가능성에 대한 아이들의 불안도 늘고 있다.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공부보다는 가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일을 해야 되는 경우도 생긴다. 등록금을 못 내고 점심을 굶는 아이들이 있다고 한다. 가족의 나들이가 줄어서 한 달에 한번이나마 있던 자장면이라도 먹던 외식이 줄어들었다. 피아노, 태권도, 미술, 영어 과외를 안하게 되어 혼자 노는 시간이 늘게 되어 좋은 점도 있다. 하지만 학교에서 내준 준비물을 챙기지 못한다. 엄마, 아빠에게 손 벌리기도 미안하고, 학교의 수학여행, 수련회에 갈 엄두를 못 내기도 한다. 고급 운동화나, 메이커 청바지는 그림의 떡이 된다. 아파도 참으라고 하고 약만 사 먹고 병원 치료는 할 수가 없다.

집의 평수가 줄어들거나 전셋집이 사글세가 되고, 그래서 이사를 하게 되고 졸지에 전학을 하는 경우가 생긴다. 부모가 노동자에서 농민으로 바뀌는 경우는 살던 환경이 완전히 새롭게 바뀐다.

이러한 모든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새로운 부담을 우리 아이들은 느끼고 있다. 변화에 적응하기가 힘들어 진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에 적응이 어려워서 정서나 행동 상의 문제가 발생하면 정신과적으로는 적응 장애라는 병명이 붙게 된다. 애들의 탓은 아니므로 치료의 어려움이 있게 된다. 하지만 병원에 올 기회가 주어진 아이들은 그래도 행운이 함께 하는 경우다.

어른들 때문에 나라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아는 아이들에게 어른에 대한 신뢰와 애국심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달러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 아이들은 새로운 사대주의와 달러 만능의 정신으로 무장하게 된다. 10년, 20년 뒤의 우리 사회의 정신건강이 염려되는 것은 결코 지나친 기우가 아니다.

# 제발 기우였으면 하는 걱정들

정신과 의사로서 특히 염려되는 것은 자살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98년 2월의 조사에서 성인 직장인 중 25.7%가 자살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그 동기는 경제적 어려움과 삶의 공허함이 주종을 이룬다고 했다. 부모의 자살을 접한 아이들의 정신적 충격과 그 충격으로 인해 정상적 성장과 발달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매우 심각하다.

1997년 전국적으로 자살한 중고생 180명 중 그 자살 동기의 43.9%는 가정 문제라고 한다(교육부 조사). IMF시대에 가정의 불안으로 인해 우리 아이들의 자살이 늘어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굳이 연구까지 않더라고 너무 명백하게 결론 내릴 수 있다. 부모가 생계에 쫓기다 보면 아이들의 마음을 살펴볼 여유가 없다. 그래서 더욱 아이들의 자살은 늘 수밖에 없다.

더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것은 동반자살이다. 3월 28일 경기도에서 어떤 부부가 아들(7세), 딸(5세)을 극약을 먹여 숨지게 한 후 철사 줄로 목을 매 함께 자살하였다. 부모의 실패와 좌절을 순진 무구한 자녀와 같이 떠맡는 현상은 우리를 너무나 참담하게 만든다.

실직한 가장의 가출도 늘고 있다. 가정과 자녀를 팽개칠 수밖에 없는 심정도 이해가 가지만, 자신을 버린 부모를 둔 아이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부모에게 배울 것은 나도 어려움이 생기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면 된다는 단순한 논리밖에 없다. 그래서 아이들도 곤경에 처하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쉽게 가출하게 된다. 청소년의 가출은 이미 사회문제가 되어 있었다. 그 원인으로 47.9%가 부모와의 갈등을 이야기한다(한국 기독교 청소년 선교회). 1997년의 조사에서는 전체 가출 학생의 56.8%가 맞벌이 가정의 자녀(인천시 교육청)였다고 한다. 맞벌이가 늘어나고 부모와의 갈등이 심화되기 쉬운 지금은 더욱 쉽게 아이들이 집을 나가게 될 것이다.

물론 좋은 소식도 있다. IMF 이후 가출했던 아이들이 돌아오기도 한단다. 미성년자의 고용 인원 감축 즉, 유흥업소의 불황으로 인한 영계(?)들의 수요 감소와 주유소 총잡이와 음식점 철가방을 대상으로 한 감원이 그 이유라고 한다. 하지만 따뜻한 부모의 사랑과 가정의 평화 때문에 가출이 취소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우리 아이들의 가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라서 씁쓸하기만 하다.

비정한 어른들은 어린아이를 버리기도 한다. 최근 영아 일시 보호소에 아기들이 예전에 비해 최고 두 배까지 맡겨지고 있다. 아이들은 가정에서 따뜻한 사랑의 젖을 먹고 자라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시설을 구비한 보호시설에서 자라더라도 가난한 자기 집에서 자라는 것만 못하다.

최근 일간지에서 모 축구 감독이 영국에 유학하던 고등학생 딸을 귀국시켰다는 보도를 보았다. 본인의 연봉이 1억인데 딸의 교육비가 연간 3천만 원에서 6천만 원으로 늘어나 버려서 눈물을 머금고 귀국시켰다는 것이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부모들이 해외로 유학시켰던 아이들이 올 들어 귀국하는 숫자가 늘고 있다. 교육제도의 차이와 급격한 환경 변화에 적응이 어려워서 문제 행동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극히 일부에 한정된 이야기겠지만 IMF가 우리 아이들에 미치는 영향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 IMF의 긍정적 측면도 바라보자

얼마 전 외래 진료실에 수년간 엄마하고만 다니던 환아의 아빠가 나타났다. 요즈음 일거리가 줄어서 시간이 났다고 한다. 환아는 아빠와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고, 의사는 치료에서 아빠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좋았다. IMF의 긍정적 측면이다.

위기는 또 하나의 기회이다. 필자가 진료 도중에 단골로 사용하는 메뉴 중의 하나다.

IMF이후에 일반인들의 TV 시청 시간이 증가했다고 한다. 이 남는 시간을 온 가족이 대화하고, 같이 어려움을 이겨내는 경험을 공유하는 시간으로 사용해야 한다. 대화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고 갈등을 해결하는 유일한 해결책이기도 하다. 우울하고 허무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대화를 많이 해보자. 어른들보다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말이다.

어른들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은 어려울 때 자기 자신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배운다. 실직해서, 사업이 안돼서, 돈을 떼어서 슬퍼하고 좌절하기보다는 그 것을 어떻게 참아 내고 극복해 나가는가를 어른들이 행동으로 보여주자. 많은 재산을 자녀에게 상속해 주는 것보다 더 소중한, 정신적 유산상속을 많이 해줄 수 있는 것, IMF가 가져다 준 기회이다.

학교교육의 재검토도 필요하다. 대학 진학보다는 직업 위주의 교육으로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우리는 수십 년 간 실용성과 합리성이 결여된 교육제도 안에서 성적이라는 그물에 아이들을 가두어 놓으려고 했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는 유행어를 낳았고, 대부분의 성적이 그만그만한 아이들을 좌절시키고, 학교 밖으로 내몰면서도, 우리는 아이들을 학교에 남아 있으라고 외쳤다. 모두다 대학을 목표로 키우기 보다, 적성에 맞고 능력에 맞으면서 위기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직업교육의 강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물질적 풍요에서 금전 만능과 성적 제일주의가 판치던 세상을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멀리 보자. 눈앞의 이익과 어려움에 집착하면 10년, 20년 뒤를 바라보기 어렵다. 지금 겪는 어려움만 생각해서 우울해하고, 짜증을 내고, 가출하고, 자살한다면 우리의 자녀들도 근시안을 가진 어른으로 자라게 된다. 미래를 미리 생각하고 장래를 위한 정신적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IMF는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 기회도 된다. 돈으로가 아닌, 물질로서가 아닌 사랑으로 아이들을 키울 수 있는 기회일 수 있다. 백가지 영험한 약과 많은 재물이 있은 들 무엇하랴. 부모의 사랑만한게 없다.

이제 어려울 수록 눈앞의 어려움에만 집착하지 말고, 우리 아이들의 마음, 그들의 꿈과 고민을 살펴보자.

(이 글은 1998년 5,6월 월간 전남대학교병원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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