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들을 사랑했을까?

전남의대 정신과 / 전남대학교병원 소아청소년 정신건강클리닉
최 영


모든 사람들은
당연한 사실을 잊고 산다.
자기가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 팻 캐롤 -

의사로서 햇병아리이던.... 인턴 근무를 막 시작한 3월의 일이다. 병원 건물의 바깥 계단에서 새벽녘 동 터오는 하늘을 우러르며 남 몰래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그리고 행여나 누가 볼세라....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르던 시절이다.

죽어가는 한 내과 입원 환자의 심폐 소생술을 밤잠을 송두리째 빼앗기며 상급 전공의와 번갈아 했었는데... 그 결과는 사망이었다. 의사로서 진료에 참여했던 환자의 첫 죽음... 그래서 눈물을 혼자 몰래 흘렸다. 슬픔의 눈물은 아니었다. 의사로서 꺼져가는 생명을 되살리지 못한 무력감과 미안함에 대한 언어적 표현의 대체물일 뿐이었다.

그후 1년이 지나... 정신과 레지던트로서 처음 담당했던 환자가 있었다. 함구증(말을 전혀 않는 증세)과 식사 거부, 그리고 꼼짝 않고 똑 같은 몸 자세를 유지하는 소위 긴장형 정신분열증 환자였다. 10대 후반이었다. 20대의 정열이 넘쳤던 당시.... 이론적으로는 무지하지만 의사로서의 투지와 정열 하나로 시간과 에너지를 아낌없이 바쳤다. 말 한마디 않는 환자를 앞에 두고 두 세시간 동안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다해가며 부대꼈다. 2주일 쯤 지났을까? 환자가 하던 더듬거리는 한 마디에 흥분에 들떠서 며칠을 보내고.... 부모가 만족할 정도로 호전되어 퇴원했다. 2년 뒤 그 환자의 형도 담당해서 치료하게 된 어쩌면 인연이라면 인연이 많은 환자였다.

그리고 몇 년 뒤.... 군의관 복무를 마치고 일반인의 신분으로 돌아왔던 무렵, 그 환자의 사망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남 몰래 눈물을 흘리는 것말고는 내가 한 일은 없다.

내가 그들을 사랑했을까?

이 화두가 2000년 6월 내내 머리 속을 터질 듯이 맴돌고 있다. 쪼이는 듯한 머리와 어깨의 통증, 그리고 불면의 밤... 이윽고, 그리고 만사가 귀찮은 정도가 되고 말았다.

내가 그들을 사랑했을까?

여기에서의 그들은 내가 의사로서 18년 동안 만났던 환자와 보호자들이다.

올 초에는 모 신문사에서 의사를 지칭하며 황금밥통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내가 만난 수 많은 환자들 중 한명이라도 나를 황금밥통으로 보았을까? 그들은 면담 과정에서 내 입에서 튀어나온 수많은 단어 중 하나라도 내 밥그릇 챙기기 위한 목적 아닌가라는 의문을 던졌을까? 내 약물 처방에 대해서 나의 돈벌이를 위해 불필요한 약을 썼는지를 의심했을까? 입원을 해야 한다는 권유에, 병원 수입을 올리려는 비열한 의도가 있다고 선글라스를 쓰고 바라보았을까?

의사들은 집단이기주의의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의약분업을 훼방 놓으려 한다고 몰아 부치는 (자칭)시민단체(나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그들이 스스로 주장하는 시민단체라는 용어를 인정하기 어렵기에 꼭 자칭이란 말을 붙인다)에서 한 마디하면, 기자들은 앵무새처럼 들고 있는 펜을 칼처럼 휘두른다. 그런 기사에 많은 국민들은 맞장구를 치며 의사의 주장이라면 당연히 집단이기주의려니... 한다. 내가 만났던 그들도 그랬을까? (자칭)시민단체에서 보건복지부로부터 의약분업에 대한 수십 억대 홍보비를 수령했다는 사실... 그래서 적어도 의약분업 문제에 관한 한 더 이상 시민단체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자칭)시민단체의 대표로 있는 모 교수가 몇 년 전부터 1억이상이 되는 연구비를 제약회사와 약사회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사표를 썼으니 이제 못 만날 수도 있다는 어쩌면 지나치게 냉정한 통고에, "선생님... 이기세요...", "다음에 꼭 만나요.....", 보건복지부에서 처방전에 병명이나 질병 코드를 쓰도록, 그래서 환자의 질병을 남에게 알리지 않을 권리가 침해당할 수밖에 없는 잘못된 제도를 만들고 있다는 소식에 "우리 대신 싸워주시겠지요?" 오히려 나를 위로 해주던 환자와 보호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진료실밖에 나가서는 "Fuck... 어쩌고 저쩌고...." 했을까?

병원에만 가면 3시간 대기에 3분 진료를 한다고 언론은 떠들어 댔다. 그리고 그 주범은 의사들 때문이란다. 의사들은 잘못되고 왜곡된 의료제도의 피해자일 뿐임을 주장해도... 그래서 제도를 합리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해도.... 그들은 나 몰라라 했다. 내가 진료한 환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선생님 피곤해보이네요.... 오늘은 빨리 끝내주셔도 되요." 오히려 나를 위로해주던 환자와 보호자들도 의사가 주범이라고 생각했을까?

건수만 생기면 의사들을 공격하는 무기로 언론과 (자칭)시민단체는 의사들이 탈세를 한단다. 범죄자 집단이란다. 이를 어쩌나... 나는 여태 월급쟁이만 해서 탈세한번 못해봤는데.... 범죄자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고 하므로 나도 범죄를 저지르라는 말인가? 내가 진료했던 환자들도 나를 탈세범으로 보았을까?

의료보험 공단에서는 틈만 나면 의사들이 허위청구와 과잉진료를 한다고 언론에 흘려왔다. 의사들의 교과서적인 양심진료를 그들이 발행한 급여지침이라는 소책자의 잣대로 조자룡 헌 칼 쓰듯, 엿장수 맘대로 횡포를 부렸음을 감추고서 말이다. 수천 억 원을 들여 초호화 병원을 지어 보험재정을 축내고 있음은 쏙 빼놓고서... 그들만의 잔치를 위해 국민의 보험료를 물쓰듯 하면서.... 허위청구니 과잉진료니 하는 기사를 보고... 내가 진료했던 그들도 나를 포함한 의사 전체를 허위와 과잉 진료의 덩어리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았을까?

참 이상한 세상이다. 분명히 행정부는 천원짜리 진료를 하라고 하는데, 사고가 나면 10만원 짜리 진료를 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사법부는 판결을 내린다. 한국 의사들은 노예인가? 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

주장을 외쳐도 ... 외쳐도... 공허한 메아리만 돌아오는 현실..... 최후의 수단으로 폐업과 사직서 제출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참담한 상황이나 그 과정의 고통은 무시한 채..... 지금까지 환자를 볼모로 (환자들이 있는데 너희들이 어쩔거냐!)... 정당한 주장마저 내팽개치던, 정부, 언론과 (자칭)시민단체들! 환자를 볼모로 한 의사들의 집단이기주의라고 하는 그들의 주장에 내가 진료하던 환자와 보호자들도 같은 심정일까?

폐업기간 중 마치 전국의 병원에서 환자들이 죽어 나가는 것처럼 언론은 보도했다. 의사들이 생명을 볼모로 했단다. 사표를 내던졌지만, 환자 곁을 떠나지 못하고 응급실과 중환자실의 당직실에서 새우잠을 자가며, 피곤에 지친 물먹은 몸을 이끌고 환자 치료에만 몰입했던 젊은 교수들과 함께 나는 오열했다. 우리가 과연 생명을 버린 적이 있던가? 하이에나처럼 환자의 죽음만을 기다리며 카메라를 들고 응급실을 서성이던 기자들.... 정말 그들이 의료 대란을 원한 것 아닌가? 그들이 생명을 볼모로 삼았던 것 아닌가? 의료 대란은 결코 없었다.

언론과 (자칭)시민단체의 주장을 듣고 있노라면 또 다시 오늘의 화두가 나를 아프게 한다. 이제 이 땅의 의사는 의무와 책임만 있고 권리는 없다. 현대판 노예, 그 자체다. 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학생들을 강의실에서 떠나보내고, 전공의들이 병원을 벗어나고.... 자괴감과 참담함에 교수 사직서를 쓴 것에 대해 역시 그들은 또 집단 이기주의라고 했다.

이제 의사는 이 땅에 없다. 의기술자만 남았다.

"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팻 캐롤의 말대로 내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다. 이제 착각의 안경을 벗고, 과거의 눈물은 거두어야 한다. (www.DrChoi.pe.kr)

(지나치게 감정적인 부분이 있지만 현재의 생각을 어떤 형태로든 표현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홈페이지에 싣습니다. 글에 대한 토론은 사양합니다. 제 개인의 자유 견해입니다. 200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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