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년 전 의서에 적힌 치료법을 그대로 따르시렵니까?

최 영 childpsy@drchoi.pe.kr

- 원문은 [건강과 과학 hs.or.kr ]에 실렸습니다 -


사람이 아프게 되면, 적절한 치료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이런 노력의 와중에 환자가 선택하는 치료법은 의사의 처방에 의한 경우도 있지만, 개인적인 경험이나 주변 사람들의 권유, 신문과 방송의 의료 관련기사 또는 인터넷 사이트의 건강정보를 참고하는 경우도 매우 흔합니다.

우리 주변에 흔하게 널려있는 다양한 "건강정보"나 "의료정보" 안에는 대개 그 정보의 근거가 되는 문헌이 제시되거나 전문가의 말이 담겨있습니다. 환자가 치료방법을 적절하게 선택하기 위해서는 과연 이런 "문헌"이나 "전문가의 증언"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를 잘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판단을 내리는데 필요한 몇가지를 게임의 형식을 빌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게임 설명 : 다음은 과거에 실제로 행해졌던 특정한 질병의 치료방법에 관한 내용입니다. 아래의 단계(Stage)를 차례로 거치면서, 각 단계에 제시된 치료법을 자신이나 가족이 받아들일 용의가 있는지 스스로 문답 해보시기 바랍니다.

READY? 3.... 2.... 1.... GAME START!

Stage 1 : 버찌(체리)를 섞은 라임차(茶) (주: lime - 열대산의 레몬 비슷한 과일로 청량음료로 사용됨)

먹어볼 만하다고요? 저도 그렇습니다. 라임과 체리는 시판되는 음료에도 들어있는 것이어서 차(茶)로 한잔 마시는 것에 별로 부담이 없겠습니다. 마실 수 있는 분만 다음 Stage로 갈 수 있습니다.

Stage 2 : 제비꽃, 유리지치(샐러드 및 약용으로 쓰이는 지치科 식물), 나도개별꽃, 짚신나물

풀의 이름이군요. 샐러드로 드실까요? 녹즙을 낼까요? 아니라면 약탕기에 넣어 다려서 드시겠습니까? 직접 먹어보지 않아서 맛은 알 수 없지만, 이런 종류의 풀이 맛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조금 무리더군요. 그래도... 드실 용의가 있다고요? 먹을 수 있는 분만 다음 Stage로 가세요.

Stage 3 : 진주층 가루 (주: 眞珠層 - 자개의 재료가 되는 진주빛깔의 파란조개)

도대체 무슨 질병의 치료법이길래 조개 가루까지 먹어야 된답니까? 하지만.... 몸에 좋다면, 이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조개 가루를 드실 수 있는 분은 다음 Stage로 가세요.

Stage 4 : 1) 당나귀 젖 2) 개구리, 송아지 및 뱀을 섞은 거북이 수프 3) 연한 어린 독사에 녹용(사슴 뿔) 젤리를 섞은 것

당나귀 젖까지는 어떻게 해보겠지만... 욱, 저는 기권입니다. 하지만, 병을 낫기 위해서라면 꾹 참고 먹어보겠다는 독자도 계시겠지요? 기권하신 분이나 통과하신 분이나 모두 보너스 Stage로 가보시기 바랍니다.

Bonus Stage I : 관장(enema)

항문(肛門)을 통해 약액(藥液)을 장내(腸內)에 주입하는 것이 관장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이미 관장을 해 본 분들도 계시죠? 심한 변비 때문에? 아니면 수술을 받기 전에? 아... 몸 안의 독소를 제거한다거나 체중을 빼준다고 광고하는 커피관장을 해보셨다고요? 커피관장의 신봉자라면 이 글을 읽는 효과가 어쩔지 모르겠군요. 저는 사양하겠습니다. 다음 단계로 가세요.

Stage 5 : 의사인 제가 이전 단계에 제시된 치료법들을 실제로 임상현장에서 환자에게 처방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버찌(체리)를 섞은 라임차(茶), 제비꽃, 유리지치, 나도개별꽃, 짚신나물, 진주층, 당나귀 젖, 개구리, 송아지 및 뱀을 섞은 거북이 수프, 연한 어린 독사에 녹용 젤리 섞은 것, 그리고 관장... 설마 제가 그런 처방을 하겠느냐고요? 좀, 엽기적인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이런 처방을 한다면 환자들은 이상한 의사라며 위 아래로 훑어보기 마련이고, 동료 의사들은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제동을 걸 것이며... 십중팔구는 법의 심판대에 오르기 십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시된 처방은 실제로 18세기 스페인에서 양극성장애(조울증) 치료에 사용되었던 것들입니다. 양극성 장애란 우울한 시기(우울기)와 들뜬 시기(조증기)를 번갈아 경험하는 것으로 조증 시기에는 비정상적으로 높은 활력과 흥분, 주체할 수 없이 떠오르는 생각들, 충동적이며 부적절한 행동 등을 나타내게 됩니다.

당나귀 젖을 마시게 하고, 파충류 스프를 먹이고, 관장을 시키면 조울증 환자가 좋아질까요? 못 믿겠다고요? 분명히 당시의 치료법들을 집대성해놓은 의학서(醫學書)에 실린 방법입니다. 당시 스페인은 16세기 중엽 이후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식민지 외에도 나폴리, 시실리아, 사르데냐, 네델란드 등을 손아귀에 넣어 스페인의 영광이 절정에 달하였지요. "태양이 지지 않는 제국"... 그런 대국의 의술을 집대성한 醫書에 나온 것이니 당연히 믿으시겠지요?

Stage 6 : 제가 18세기 스페인 醫書를 근거로 제시하면서 양극성장애(조울증)의 치료는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대중 컬럼을 쓰고, 또 역시 환자의 진료에서 사용한다면 저에게 뭐라고 하시렵니까?

돌이 날라오는군요. 이런 근거를 대도 결론은 여전히 같다고요? 돌팔이로 신문 사회면에 실리거나 TV의 시사고발 프로그램에 등장할 가능성도 높으며... 아마 정신과 환자 또는 가족 단체의 시위가 제가 근무하는 병원 앞에서 벌어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치료법들은 醫聖 히포크라테스가 지은 책에 실린 것이건.... 제국의 영광에 빛나는 18세기 스페인 醫書에 쓰여진 것이건... 현대의학에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으며, 그래서도 안되는 것들입니다.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서 효과가 없음이 입증되었거나, 효과가 있다 하더라도 플라시보(위약)와 비슷한 효과를 보인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해당 치료법은 폐기됩니다. 더 좋은 효과를 보이는 치료법이 발견 또는 개발되는 순간, 과거의 치료법은 그 책임을 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동일한 효과가 있더라도 부작용이 훨씬 적은 새로운 치료법이 개발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어도 현대의학에서는 이런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Final Stage : 18세기 스페인 醫書의 치료법을 금과옥조로 믿고 그대로 따르는 것과 동일한 행태가..... 21세기 한국 의료 현장에는 과연 있을까요? 없을까요?

이 Stage의 문제 해결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겠습니다. 단, 독자의 판단을 돕기 위해 어떤 사이트에 건강정보로 실려있는 내용을 옮겨오는 것으로 게임을 끝내기로 합니다.

석창포는 "신농본초경"을 비롯해 "본초강목", "향약집성방", "동의보감" 같은 옛 의학책에 늘 첫머리에 실려 있는 약초다. (중략) 석창포는 간질이나 정신병 같은 뇌질환에도 좋은 효과가 있다. 간질발작 때 석창포 12그램을 물 한 잔에 넣고 반잔이 되게 달여서 하루에 세 번 나누어 마시기를 계속하면 발작 횟수가 차츰 줄어들고 발작이 가벼워진다. 오래 복용하면 완치도 가능하다. (중략) 또는 닭 한 마리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그 속에 석창포를 넣은 다음 푹 끓여서 그 물을 마시는 방법도 간질 치료에 효과가 크다. 남자는 암탉을 쓰고 여자는 수탉을 쓴다. (중략) 정신 분열증, 조울증, 정신불안증, 말을 많이 하고 잠을 안 자는 증상 등에는 석창포 20그램, 용담, 시호 각 12그램, 대황 8그램을 달여서 하루 서너 번에 나누어 마신다. (후략)

(참고자료 : 의서명과 간행시대)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 중국 후한-삼국시대 간행
신농본초경집주(神農本草經集註) 서기 600년경 중국 양(梁)나라 간행
본초강목(本草綱目) 서기 1596년, 중국 명(明), 간행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서기 1433년, 조선 세종 15년, 간행
동의보감(東醫寶鑑) 서기 1613년, 조선 광해군 5년, 간행

(다들 아시겠지만, 지금은 21세기입니다.)

Bonus Stage II : 오래된 것은 좋은 것?

어떤 분은 수천 년, 또는 수백 년 동안 전래되어온 치료법이라면 "효과가 있어서 그런 것 아니겠느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대대로 내려 온 전통 비법"이라는 주장을 하며 당당하게 판촉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오래 된 치료법은 효과적일까요? 오래 된 치료법은 부작용이 없을까요? 대부분 컴퓨터 화면을 통해 이 글을 읽고 계실 것이므로 컴퓨터 이야기를 해보죠.

어떤 사람이 "오래 된 구식 컴퓨터가 좋은 컴퓨터"라고 주장한다면 그 말에 동의하시겠습니까? 기존하는 컴퓨터의 문제점을 고치고 보다 빠르고 효율적인 작업이 가능하도록 기능과 디자인을 개선한 결과가 상위 기종의 새 컴퓨터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구식 컴퓨터 또는 오래 된 컴퓨터가 좋은 컴퓨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병에 대한 기존 치료법에 한계가 있고 부작용이 있다면, 기존의 치료를 대신할 만한 새 치료법을 개발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져야 마땅합니다. 그 노력의 결과로서 효과가 입증된 새 치료방법이 나왔다면, 마땅히 새 치료법을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이때, 오래된 구식 치료는 좋은 치료가 결코 아니며, 새 치료를 통해 호전될 가능성을 빼앗는다는 상대적인 관점에서 오히려 환자에게 해를 주는 치료법이 되고 맙니다.

구형의 오래 된 컴퓨터가 좋은 컴퓨터가 아니듯, 오래된 치료법이 좋은 치료법이라는 논리는 잘못된 것입니다.

GAME OVER

- "I'll Be Back!" (터미네이터2 중에서..) -

- 처음 쓴 날 2003/04/26 -

HOME - 자료실 - 건강바로보기 - 게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