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열병 환자의 도시락

전남의대 정신과 / 전남대학교병원 소아청소년 정신건강클리닉
최 영


며칠 전 외래 진료실에서 20대 후반의 남자환자 P(성명의 이니셜이 아님)를 만났다. 건장한 체격에 준수한 외모, 정장 차림과 잘 닦여진 구두, 그리고 가방을 든 말쑥한 모습이었다. 가방 안에 무엇이 들어있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P는 다소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도시락이 들어있다고 대답했다. 입원치료를 마친 후 모 기관에서 운영하는 주간센터(낮 병원과 유사한 개념)에 다니는 중이었기 때문에, 도시락을 가지고 다닌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싸 준 도시락이었다.

대졸 학력을 가진 P는 5년 전 발병해서 최근까지 포함해서 세 차례의 입원치료를 받았다. 세 번째 입원 치료과정에서 직장을 잃었다. 의학적인 진단명은 정신분열병이다. 발병 당시에 함구증(말을 전혀 하지 않는 상태), 납굴증(마치 밀랍 인형처럼 딱딱한 자세를 오랫동안 그대로 취하는 것) 등이 특징적이었다. 남들이 나를 죽이려고 한다는 피해망상과 "죽인다" 또는 "죽어라"는 내용의 환청이 있었다. 당시의 P의 얼굴 표정은 말 그대로 마스크를 쓴 사람과 같은 무표정 그 자체였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발병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약물치료의 중단이 그것이다. 첫 번 입원 후 증상이 사라지고 직장생활을 그런 대로 잘 하게 되자, 환자와 가족들이 임의로 약물투여를 중단했고, 몇 달 뒤 재발했다. P는 정신병의 가족력이 있고 몇 가지 뇌 검사에서 이상 소견이 있었기 때문에 재발의 가능성이 높은 경우였다. 재발을 막기 위한 약물치료가 절대적임을 강조했지만, 아마 환자와 보호자에게는 마이동풍이 되었나보다.

두 번째 입원치료과정에서는 정신분열증은 더 이상 "마음의 병"이 아니라 "뇌의 병"이라는 것, 그래서 치료와 재발방지를 위해서는 약물치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재삼 강조했던 기억이 있다. 어쨌든 한달 정도만에 퇴원을 했고, 그 후 다시 직장을 얻어 2년 정도 잘 생활했다. 하지만, 하루에 한번 복용하는 약물치료가 환자에게는 나름대로 부담이 되었다고 한다. 장기간 약물을 복용해야 된다는 것 자체가 불편하기도 했을 것이다.

몇 달 전 P의 누나가 자신이 다니던 한의원에 동생에 대해 지나는 말로 문의를 했다고 한다. P의 말에 따르면 "정신과 약은 근본적인 치료가 안 된다. 독한 약을 그렇게 오래 먹으면 되겠느냐. 자신이 처방한 한약을 먹으면 근본적인 치료가 될 것이다"라고 했단다. 옮겨진 말이기 때문에 100%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당사자와 가족들은 그렇게 들었다고 한다. 환자와 보호자 입장에서는 얼마나 귀가 솔깃한 정보였을 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비싼(정신과 외래에서 1년 이상 치료하고도 남을 비용이었다) 한약을 정성스럽게 다려 먹으면서 정신과 약을 끊었다. 홀가분하고 병이 나은 것만 같은 기쁨에 직장에 즐겁게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세 달 후 직장동료들이 자신을 따돌리는 것 같고, 누군가 미행한다는 의심이 들고 잠이 설쳐지더니... 결국 "죽인다"는 환청에 압도되어, 전혀 말도 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제자리에 밀랍 인형처럼 서있는 모습이 가족에게 발견되어 다시 입원하게 되고야 말았다.

세 번째로 입원실에서 P를 만난 필자는 화가 났다. 하지만 차마 그 화를 P에게 표현할 수 없었다.

그 분노는 그렇게 약물치료의 중요성을 강조했음에도 약물을 중단한 P와 그 가족을 향한 것이었을까? 근본적으로 치료해준다며 성분 미상의 비싼 한약을 복용시키고 정신과 약물을 끊게 만든... 그래서 세 번째 재발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한의사에 대한 것이었을까? 이런 혹세무민이 난무하는 이 사회에 대한 것이었을까? 그도 저도 아니면, 이런 비과학적이고 불합리한 세상사에 무력하기 짝이 없는 필자 자신에 대한 것이었을까?

다시 외래 진료실로 되돌아가 보자.

필자는 P씨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주간센터에 다니면서 사회성을 좀더 기른 후, 기술을 배워 이번에는 오랫동안 일할 수 있는 곳에 취직해보겠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P의 얼굴에 흐르는 잔잔한 미소가 참 보기 좋았다.

필자는 바란다.

앞으로 몇 년 후에는 P가 부인이 싸준 도시락을 들고, 아이의 빠이빠이를 받으며 직장에 출근할 수 있기를. 지금 짓고 있는 환한 미소가 그대로 유지되기를. 그리고 P의 환한 미소를 빼앗는 자들이 더 이상 없기를...

- 2002.1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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