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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머리 깎기

최 영 childpsy@drchoi.pe.kr

모든 길은 벌레로 통한다


제목을 보고 혹시 저희 집에 벌레가 많거나, 무슨 벌레를 키우나 보다라고 오해하실 분은 없겠지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을 잠시 빌려온 것뿐이랍니다. 둘째를 키우면서 말귀를 조금 알아들을 무렵부터는 이 닦을 때, 약 먹일 때, 로션이나 피부 연고 바를 때, 심지어는 손톱발톱 깎을 때도 벌레를 써먹는다는 것입니다.

처음 이를 닦으려는 부모의 시도에 어린아이들이 저항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아이 입장에서 흉칙하고 겁나게 생긴....끝에 뭔가가 매달려 있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막대기를 자신의 입에 무지막지하게 집어넣고는 문질러대는 부모의 행동에 다소곳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하겠지요. 저희 집에서는 이 닦을 때 벌레잡이 놀이가 시작됩니다. "충치벌레가 있네... 으아... 여기도 또 한 마리.. 저기도... 또.... 야! 이제 벌레들이 다 도망가버렸네...." 요즈음은 저녁에 벌레 안 잡아 주면 안됩니다. 물론 안 닦겠다고 떼쓰는 경우도 있지요.

둘째는 좋지 않은 피부 때문에 약간만 바깥 바람을 쐬어도 얼굴이 트기 때문에 로션을 자주 발라야 합니다만.... 역시 이 끈적끈적하고 알 수 없는 용도의 물질에 대해 아이가 거부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바셀린 안 바를꺼야!"에는 또 다시 소위 "벌레이론"이 다시 등장하게 된답니다. "얼굴에 벌레가 있어서... 로션을 바르지 않으면 벌레가 어쩌구 저쩌구...." 이런 상황이 되면 대개는 형도 로션을 바르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그날의 로션 바르기는 무사히 끝나고는 했습니다. 참 이상한 조건이죠?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노력.. 안 말리는 것이 좋습니다.

감기 후에 많은 아이들이 그렇듯이 몇 달 전 중이염을 앓은 적이 있습니다. 귀가 아프니까 낑낑대기에 항생제를 먹여야 했는데.... 그 전까지는 약 먹이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지를 결박하다시피 하고 강제로 입안 깊숙하게 스푼을 집어넣어야 되었으니까요. 이 때 또다시 벌레가 등장했답니다. "귓속에 벌레가 있어서... 너를 아프게 하거든?... 어쩌고 저쩌고... 벌레를 쫓아버리려면 약을 먹어야 되는데.. 운운..." 그 뒤 부터 벌레를 쫓기 위해 부지런히 약을 받아먹게 되었습니다.

인지(認知 cognition)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생각하는 방법입니다. 조금 사족을 붙이지면, 지식을 사용하고 다루는 과정, 의미를 이해하는 방식 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발달 과정에서 이 인지가 어른들과는 다르고 연령에 따라 발전을 해나갑니다. 둘째는 이 글을 쓰는 오늘 현재 만 31개월입니다. 인지의 발달 단계로 본다면 소위 전조작 단계(preoperational stage)에 해당됩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요? 언제나 그렇듯이 넘어가셔도 좋습니다.

전조작 단계는 언어라는 상징을 사용하기 시작한다는 커다란 진보가 있지만, 아직은 자신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의 개념도 부족하지요. 그래서 이를 닦지 않으면 나중에 이가 썩고 어쩌고, 약을 안 먹으면 병이 커지고 운운.... 하는 식의 어른들 설명을 이해할 수 없는 나이랍니다. 아이의 수준이나 생각하는 관점을 이해하고, 그 이해를 기반으로 키우는 것... 매우 중요합니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저희 집에서 모든 길은 로마가 아닌 벌레로 통할 것입니다. 그 벌레 소리에 무슨 이상한 소리? 라는 표정을 아이가 지을 때까지만 말입니다. (200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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