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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머리 깎기

최 영 childpsy@drchoi.pe.kr

천고마비(天高馬肥)는 없다


9월의 한 가운데 있습니다. 바야흐로 독서의 계절입니다. 물론 현재는 냉난방 시설의 발달로 일년 사시사철이 독서의 계절이겠지만 말입니다.

흔히 가을을 말할 때 천고마비(天高馬肥)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됩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한번쯤은 교장 선생님이나 담임 선생님의 훈시 내용 중에 마치 연중 행사처럼 들었던 한자성어(漢字成語)일 것입니다.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좋은 계절이니 독서를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필자는 얼마 전에 신문(동아일보 2001/08/18일자 신복룡 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을 읽으면서 작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철썩 같이 믿고 있던 이 천고마비의 뜻이 "가당치 않은 오역"이라는 것입니다. 원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말은 본시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때가 되었으니 반드시 오랑캐들도 지금쯤은 우리를 쳐들어 올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즉 국방에 더욱 마음을 쓰자 (匈奴到秋高馬肥 變必起矣 宜豫爲備)’는 뜻이었다. 오랑캐들의 침입이 말이 살찌는 가을에 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이없이 책 좀 읽자고 뒤바뀌었는데 중국의 식자들 앞에서 아는 체하느라고 우리 식으로 천고마비의 계절 운운 하니 저들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저는 책을 읽기 좋아하는 편입니다. 특별한 분야를 가리지 않고 아이들이 보는 만화에서부터 잡지까지, 시, 소설, 수필, 다큐멘터리에서 전문 서적에 이르기까지 손에 닿는 대로 읽는 습관이 있습니다. 물론, 잡식에 가까운 독서는 그다지 좋은 습관은 아니겠지만, 아들에게도 나름대로 여러 가지 분야의 책을 많이 읽도록 권하고 싶은 마음은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 나면 아이를 데리고 서점에도 가고, 서점에 들렀다가 눈에 띄는 것이 있으면 사들고 가서 집에서 전해주기도 하고, 과학계통의 잡지도 한 달에 한 권쯤은 사들고 퇴근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큰애를 데리고 서점에 가는 날이면, 아빠는 화가 나고 아이는 입이 나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유치원 다닐 때에는 아빠는 소위 정서에 좋다는 이솝이야기나 안데르센 동화류의 "고전"(아빠가 생각하는 말 그대로 20-30년 전의 고전)을 사주고 싶어했습니다만... 항상 아이가 골랐던 것은 로봇이 나오고 변신과 합체를 거듭하는 치고 받고 하는 종류의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무렵에도 비슷한 상황은 계속되었습니다. 위인전, 파스텔 톤으로 쓰여진 창작동화나 학습에 도움이 될만한 책... 심지어 고학년 때에는 '철학'을 주제로 한 책들을 은근히 권유했지만, 큰애가 고르는 것은 대개 만화, 그림이 들어간 유머, 괴담, 컴퓨터 게임 공략집 등... 하여간 아빠와 아이의 갈등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 저렇게 감언이설(?)로 꼬셔도 보고.... 고집 피우면 책 안 사준다는 협박(?)도 해보고... 어쨌거나 즐거워야할 모처럼의 외출이 아빠와 아이 사이의 신경전으로 망쳐버린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시행착오를 겪는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내린 저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아빠가 사주고 싶은 책은 혼자 구입 후 집에서 전해 줄 것, 서점에 같이 가는 경우에는 가능하다면 아빠의 고집을 버리고 아이가 원하는 것을 사주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아직도 이런 작은 결심마저 실제로 서점에 가서는 실천을 못하고 있는.... 말 그대로 "제 머리 못 깎는 아빠"랍니다.

천고마비에 대한 엉터리 번역을 마치 진실처럼 받아들이고 있듯이, 부모가 가진 아이들의 독서에 대한 특정한 견해는 "가당치 않은 생각"일 수 있습니다. 어른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책... 소위 우량도서 내지 추천도서가 꼭 아이들에게 좋을 수는 없겠습니다. 부모로서 아이들에 대한 "가당치 않은" 다른 생각은 없는지.... 한번쯤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가을은 책 읽기 좋은 계절임에 틀림없습니다. (2001/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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